무엇이 선행되어야 하는가. 가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우리가 보는 세상에서 진리나 답을 찾을 순 없다. 따라서 무엇이 선행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늘 불확실하고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다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선행되어야 하는지 끝없이 사유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정의롭다 여기는 사람은 결코 정의롭지 못하다. 정의는 절대적인 척 우리를 속이려 들어도 사실은 지극히 상대적이고 유동적인 것이다.
건축의 정의 또한 그렇다. 제도화된 틀 안에서는 그만한 규격의 건축밖에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정의를 의심하고 또 끝없이 의심하자. 건축의 정의라 여기는 것 밖에서 우리는 실제로 틀을 벗어난 건축을 만날 것이며 그렇게 발전해 나갈 것이다. /2020
서울에 가면 늘 고궁을 들리는데 투박한 돌과 갈라져 틈이 보이는 나무가 마음을 차분케 한다. 시간의 때가 묻은 그것들이 참 자연스럽고 또 과거로부터의 시간 속에 내가 서있는 듯하다. 현대의, 한국의 건물들은 매우 정제되어 있어 가까이 가면 베일 듯하니 이것은 도대체 일본과 서양의 건축이지 어쨌든 한국의 건축은 아니다. /2019
예술은 잉여가치인가. 기본적인 생존에 예술은 불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예술은 최후이자 최고의 가치를 갖는 것일까.
창작의 흐름은 작가의 사유 - 결과물 - 관객의 사유로 전개된다. 그 결과물은 수많은 사유 틈에 끼여있지만 어떠한 간섭 없이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작가 또한 작업을 마친 후에는 관객의 사유를 가진 한 명의 관객이 된다. /2019
미술관에서 환경주의 작가들의 작품들을 보면 메스껍다. 온도, 습도, 조명 등을 늘 최선으로 조절하는 거대한 기계 속에서 혼자만 고고한 척, 지구를 위하는 척하는 작품들을 보고 있자면 그 뻔뻔함에 역하고 치가 떨린다. /2019
7년간 살던 싱가포르에 7년 만에 왔다. 이곳에 살 때 적응했던 이 푹푹 찌는 날씨는 오랜만에 찾아온 날 심술 내듯 괴롭힌다. 크게 변한 것이 없다. 지리, 음식, 건물 등은 전부 곧 다시 기억난다. 여기서는 혼자 다닌 적이 거의 없다. 어딜 가든 친구들과 함께였고, 무엇을 하든 홀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나는 혼자 있다. 어느 곳을 가든 떠오르는 이 많은 추억을 공유할 사람이 없다. 다른 여행지처럼, 혹은 그것보다 훨씬 더 잘 다닐 수 있을 줄만 알았건만 다닐수록 그저 마음이 공허하다. 웬만하면 혼자 다시 오고 싶지 않은 곳이었고, 그래서 고민도 많이 했지만, 체감되는 허전함은 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 장소성이 나를 괴롭힌다. 아직은 오지 말 것을 그랬다. /2019
해안가 카페에 앉아 작게 나있는 창을 통해 파도를 본다. 바람이 적당히 불어 아름답게 물결치는 파도를 보며 유기적인 건축에 대해 한참을 생각하다 문득 겁이 난다. 저처럼 건축을 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인다. 아무리 흉내 내려 해도 도저히 조금이라도 흉내 내지 못할 것 같다. /2019
수업이 저녁 늦게 끝나는 날에는 늘 학교를 나가기 전 멈춰 서는 곳이 있다. 내가 이용하는 쪽문 옆에는 큰 붉은 벽돌 건물이 있는데, 건물에 달린 조명 밑으로 반짝반짝 빛이 나는 벽돌들이 참 예뻐서 어떨 때는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얼마간 멍하니 보고만 있는다. 저 건물을 지은 사람이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본연적 재료가 내뿜는 원초적인 아름다움이 참 감명 깊다. /2019
내 눈을 비운다. 과거와 현재의 사진이 흐트러져 어긋나 교차되는 지점이 보이고 그곳에 보풀이 일어난다. 그 실오라기를 따라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때때로 상상한다. 또 이따금 겪었던 것을. 그것이 장소성이 지닌 힘이다. 때로는 실체가 없는 것이 강한 힘을 가지고 모든 것을 압도하기도 한다. /2019
한묵 화백께서 하신 말씀처럼 우리 몸 또한 공간이다.
감명 깊은 공간을 만날 때 우리는 쉬이 기억과 경험의 유발과 재해석이니 하는 말들을 해왔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단지 공간(우리 몸)과 다른 공간의 단순하고 원초적인 공명일지도 모른다. /2018
몽골 게르에서의 밤.
아홉시 반, 해가 지고 선선함과 쌀쌀함 사이의 날씨에 간단한 전통 공연을 해준단다.
몽골 전통악기 연주 후에 춤을 추는데 단순히 전통춤이 아니고, 비트박스를 섞은 현대 반주에 재해석한다. 다만 그 기본은 철저히 전통춤이다.
얼핏 예전 한국에서 공연을 봤던 기억이 떠오르는데, 비보이 춤을 기본으로 우리 전통을 얹는 것이었다.
그 한국의 공연 규모가 압도적으로 컸지만, 분명 이 게르촌의 작은 공연이 훨씬 더 성숙하다. 전통보존의 지향점은 이러해야 한다. 현대예술에 전통예술을 더하는 것이 아니고 현대건축에 전통건축을 더하는 것이 아니다. /2018
우리는 저 편평한 수평선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너무 편평해 아무것도 없는 곳을 가는 것처럼 보여도 내가 내달리는 옆으로 수많은 이들의 이론과 실험들이 낮게 깔려 수평선의 한 부분으로써 세워져있다. 우리는 여기에 랜드마크적인 높은 건물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저들과 같은 높이로 우리의 이론과 실험을 쌓고 시간을 무시하는 이 평행 속에 섞이길 희망한다. 이것들은 우리의 찬란한 DNA이며 유산이 되어 흘러간다. /2018
서울대 계절학기 중 잠시 짬을 내서 3박 4일 일정으로 다녀온 대만. 3시에 김해공항에서 내려 집에 와 밥을 먹고 7시차로 올라가야 해 6시 40분쯤 콜을 불러 빠듯하게 집을 나온다. 방금 바로 위에서 국밥을 먹고 나오자마자 콜이 떠 땡잡았다는 나이 지긋하신 기사님. 소화를 시키시려는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방금의 국밥집과 창원대 식당의 식사위생 차이를 되풀이하신다. 식중독이라도 걸리면 모가지가 날아간다며 한여름에도 김이 풀풀 나게 전기로 수저를 삶는다는 창원대와 달리 국밥집의 플라스틱 통에 담긴 누구라도 휘적거리며 집는 수저가 마음에 안 드시나 보다. 한 대여섯 번, 택시 탄 시간의 반 이상은 그 얘기만 하셨나 보다. 터미널은 크지 않지만 58분에서 9분으로 넘어가는 때에 택시가 도착해 마음이 급하다. 5천7백 원의 요금에 만 원을 내고 4천 원만 거슬러달라고 말씀을 드리니 고맙다며 손에 침을 칵 뱉으시며 돈을 세주신다. 껄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그 무의식적 내로남불 의식에 재밌어하며 얼른 가방과 짐을 들고 뛰어간다. /2018
우리는 불완전하다. 때문에 불안정하다. 불안정하다는 것은 정적이 아니라 동적이라는 것이고, 고로 우리는 계속 변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체가 정지하면 죽고, 마찬가지로 사고가 정지해도 죽는다. 한 건물의 건축양식은 어떠한 주의가 도드라진다고 표현될 수도 있지만 사람을 어떤 주의자라고 칭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사람의 불안정함, 그러니까 모호함이 몇 개의 단어들과 문장들로 재단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흔히 칭하는 어떤 주의들을 우리는 설령 의식하지 않더라도 섞고 뒤입히며 건축을 한다. 어찌 보면 그 모호함이야말로 생물에게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2018
수많은 도시들을 돌아다니면 박물관 미술관은 여지없이 들른다.
훌륭하고 배울 것 많은 그대들의 유산들은 찬란하다.
이 많은 것들을 꼭 잊지 않고 기억하며 간직하고 살고 싶지만 모든 것들을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훌륭한 작품을 볼 때마다 늘 아쉬워했다.
그러나 이제는 알고 있다. 이 모든 배움이 내 핏줄에 흐르는 또 다른 유산이 될 것임을.
굳이 기억을 짜내 돌이키려 하지 않아도 그대들은 내 핏줄 속에 흐르고 있음을. 이것은 과거 현재 미래 유산들의 관통임을. 그래서 그대들은 감동이다. /2018
대만의 중정기념당은 여지없는 링컨기념관의 컨셉이다. (컨셉이 너무 세 차마 아류라고는 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주목할 것은 너무나도 당당히 중국풍의 건축물로써 링컨기념관의 컨셉을 따랐다는 것이다. 큰 입구 입면으로부터 이어지는 좌우 대칭의 국립극장들을 잇는 기념관. 7월의 한가운데 그 건물들 사이의 거대한 광장은 걸어가기 너무 멀고 뜨겁고 또 마른 바람은 걷기도 힘들 정도로 거세게 분다. 마치 거인국에 온 것처럼 그 중심을 겨우 관통하며 걷고 있다, 극장 지붕이 만들에 내는 그늘 밑에는 90년대 한국의 힙합문화마냥 청년들이 k-pop(???)을 크게 틀어놓고 춤을 추고 있다. 기념관을 보고 계단을 내려오는 길에 극장들의 지붕을 보고 있자니 그 번들번들한 기와들에 빛이 부서져 깨지는 게, 그건 바다의 그것이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극장들과 기념관 앞의 거대한 계단들이 앉는 장소로써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광장 또한 마찬가지. 햇볕은 너무 따갑고 그늘은 없다. /2018
사유는 사유를 낳고 그 고리는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
인류의 탄생과 함께 시작했으며 절명과 함께 끝날 것이다.
다만 우리는 사고를 바꿔야 한다. 그저 인류의 발자취가 끝날 때 사유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인류의 끝을 분명히 알기에 그 끝을 맞이하려 사유해야 한다.
무엇이 선행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식의 차이점이다.
개인 또한 마찬가지다. 태어남과 죽음에 좋고 나쁨은 없다. 그저 현상인 것이고 필연적인 것이며 이미 태어나는 그 찰나도 존재치 않는 동시에 죽어있는 것이다. 펜을 세워 손을 떼는 순간 펜은 쓰러져있는 것이고 그 과정을 우리는 메꾸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죽어야 할지 생각하면 되려 내 살아야 할 방식이 보인다. /2014-8
통상적으로 우리는 인위적이라는 개념을 자연에 반하는 것으로 사용한다. 우리는 왜 우리 스스로를 자연이라고 여기지 않는가? 우리가 자연이 아니라면, 무엇이 자연이란 말인가? 우리는 분명한 자연의 일부이며 모든 우리의 행동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우리의 큰 둥지이자 경계, 도시를 포함한 에어컨, 휴대폰 등은 지극히 자연인 것이다. 귀농-농촌으로 돌아간다는 개념은 자연스럽지만 도시를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표현은 굉장히 부자연스럽다. 우리는 괜히 스스로 옥죄이려 이 경계를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숨을 쉬기 위해 나무가 필요한 것이지 나무와 콘크리트는 하등 다를 바 없다. /2017
요즘 젊은 학생들은 지식을 책으로써 탐구하기보다는 전자기기를 통해 접한다. 인터넷에 쓰이는 글들은 대게 책만큼의 분량을 쓰지는 못하기에 간단하고 직관적이게 쓰인다. 그럼으로 젊은 세대는 더더욱 어렵게 쓰인 책들을 기피하게 되고 쉽게 이해되는 글을 선호한다. 무엇이 더 좋고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책을 어느정도 읽는 편이지만 종종 너무 어렵게 쓰인 책들을 접한다. 지식은 물림이 목적이기에 어려운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는 안된다. 어려운 책을 보면 그만한 깊은 어휘들을 사용해 좀 더 깊은 사고의 공유를 위한 책과 자신이 이만큼 어려운 글들을 쓴다며 재기 위한 책이 있다. 대게는 후자가 많은 편이다. 책을 두 번 세 번 이상 또는 구절을 그 정도 읽는다는 것은 그 울림을 다시 한번 느끼거나 또 다른 해석의 재미를 위해 필요한 것이지 글 자체가 이해되지 않아 되읽어야하는 글은 가치가 없는 글이다. 젊은 층의 사유의 부재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은 비단 현시대에 도드라지는 특색이 아니라 늘 그렇듯이 더 배우고 싶어 하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이 있을 뿐이다. 내가 감히 20대의 평균이라면, 예전 고지식한 한문과 어려운 어휘들이 흩뿌려진 글로 지식을 쌓은 세대들이 조금 더 직관적인 언어로 소통하는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 진심으로 글을 통해 지식을 물려주고자 한다면, 당신들은 글을 조금 더 쉽게 쓸 필요가 있다. /2017
건물은 세우는 것이 아니라 묻히는 것이다. /2017
나의 건축철학은 서대문형무소로부터 시작된다. 16년 군 제대 후 처음 가본 서대문형무소에서 내가 받은 가장 큰 충격은 강한 1소점 투시(one point perspective)를 만드는 중압감 가득한 복도와 거기에 따라 달린 좁디좁은 수감방도, 광복이 된 날까지도 형이 집행되던 사형장도 아니었다. 외부에 부채꼴 모양의 구조물이 조그맣게 있었는데 수감자들이 운동을 했던 곳이란다. 부채의 손잡이에 서서 보니 전형적인 파놉티콘 구조로 부챗살처럼 벽이 쳐져 수감자들이 따로 들어가고 내 선 곳에 있는 간수가 감시하는 방식이다. 수감자들끼리는 사이에 벽을 두고 있기에 소통을 할 수 없다. 구조물의 의미 자체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것이 어느 나라에 어떤 사람들을 위해 지어진들 거부감이 들지 않을까. 하지만 효율성은 군더더기 없이 완벽했고 너무나도 직관적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좋은 건축물인가? 혹은 완성도 높은 건축물임에도 사용자가 좋지 않은 의도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좋은 건축물이 될 수 없는가? 건축의 좋고 나쁨은 어느 선에서 결정되는가? 우리는 흔히 쉽게 좋은 건축, 나쁜 건축을 나누지만 그저 개인의 마음에 들고 들지 않는 건축이 있을 뿐 우리가 지은, 그 자체로는 그저 서있기만 하는 구조물이 홀로 좋고 나쁠 수 있는가? 그 쉬운 말들은 우리 석공들의 오만이라 생각한다. 무엇이 좋은 건축일까, 건축이 좋을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을 계속한다. 아마 내 죽을 때까지는 답을 내리지 못할 것 같다. /2017
모든 상황은 개인의 다른 경험으로 인해 같은 상황이 될 수 없다.
건축가는 그저 공간을 만든다기 보다 개인의 경험을 유도해 또 다른 경험을 해주게 하는 것이다. /2017
절대정의(absolute definition)는 존재하는가? 어렸을 때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가 보는 색이 사실 각자 모두 다른 색들이 아닐까 하는. 예를 들어 우리가 보라색이라며 보는 색은 실제로 나에겐 빨간색이고 내 친구에겐 노란색이지 않을까 하는. 건축을 하며 비슷한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사용하는 약속된 단어(예를 들어 의자) 조차 개인의 경험과 해석에 따라 다른 정의를 가지고 있다. 보편적 약속은 절대적 정의가 아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단어를 가지고 있으며 나와 당신이 대화할 때 실제로 꼭 겹치는 부분은 단 하나도 없는 것이다. 어느 수업에서 빈 공간(empty space)과 찬 공간(filled space)에 대해 이야기할 때 교수에게 되물었다. 그 빈 공간이 지금 우리로 차있고 벽 속은 우리의 숨이 들어차있지 않은데 어떻게 딱 잘라 정의할 수 있냐고. 그 교수는 동의했지만 깊은 대화는 하지 못했다. 후에 좀 더 나이 든 또 다른 교수에게 물었더니 그것은 꼭 그것이라 했다. 내 개념이 너무 모호한 것인가, 서양 교수들이 너무 직관적인 것인가. /2016-7
내 존재의 가치와 내 가치의 존재에 대해 늘 생각하려 노력해야 한다. /2017
LA의 Cathedral of Our Lady of the Angels(천사들의 모후 대성당) 안에 들어와 앉아보면 어떻게 형용할 방법 없이 그저 좋은 건축물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형식과 형태가 이상적으로 어우러져 있다. 천장과 벽이 어필하는 생동감이 느껴진다. 이토록 편하고 감명 깊은 느낌은 형태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맨 뒤편 의자들 사이에 성수가 힘차게 흐른다. 그 옆에 앉아 건물을 한참 보고 있자니 더욱이 이 건축물이 유기적이고 흐름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유동적)이 든다. 오히려 이 대단한 구조들이 성수의 소리에 묻혀버리는 듯하다. 단지 빛과 벽이 건축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2016
비를 맞으며 도쿄를 걷고 있다. 역에 내려 주택 골목을 헤치며 조금씩 보이는 저 거대하게 솟은 성당이 내 쫓고 있는 것이다. 우산을 털어 접으며 들어가니 안경에 뽀얗게 김이 서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빛이 있는 것은 알겠다. 조금 기다리니 서서히 감동이 보인다. 저 뒤에 앉아 가만히 받아들이고 있자니 몇 시간이고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보다 더 감명적인 빛이 있으랴. 실내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지만 아쉽지는 않다. 어느 순간부터 엄청난 감동을 받는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기록용으로 한 장 찍을까. 내 머리 그득한 그 감동을 오롯한 주관적 기억으로 남기고 싶다. 이 빛처럼. /2016
건축은 무엇을 위함인가? 최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효율성이다. 어떻게 공간이 할당되고 건축물이 사용되어지는가. 그것이 의미의 효율성이든 공간의 효율성이든 중요치 않다. 하지만 공간의 효율성만으로 볼 때 그저 흔히 보이는 길가의 오피스 건물들이 최적의 건축이 아닌 것인가? 조금 멋은 없지만 저 밋밋한 사각형 건물들은 진정 효율적으로 설계되었다. 건축과 불편함은 원래는 상반되는 것이다. 아, 우리는 각자 다른 무게추를 달고 불균형해 기울어지는 저울 위에서 건축을 하고 있다. /2016
오슬로 시내의 건축물들은 수평적이다. 여기에 공동성이 있고 신선함이 있다. 거리마다 제각각의 표피를 가지고 있어 지나가며 고개를 돌릴 때마다 충격이 계속된다. 가히 수평성과 화합의 지속성이라 해도 되겠다. 여러 나라를 여행해봤지만 이렇게 거리마다 어울림이 있고 거기에 놀란 것은 처음이다. 모든 거리가 너무나 다르면서도 같다. 낡음과 새로움이 계속 뒤바뀌지만 어느 하나 튀지 않는다. 그렇다고 개성이 없는 것이 아니고, 모두 저마다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그저 다만 이 원대한 하모니에 계속해서 놀랄 뿐이다.
도로를 달리다 보면 양옆으로 나무와 하늘과 사람을 그대로 속에 간직한 푸른 호수들이 펼쳐지기도 하고 웅장한 산이 맞이하기도 한다. 보통 한국의 산으로 둘러싸인 고속도로 풍경을 보면 안전을 위해 경사를 깎아 편평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노르웨이의 길 옆 산 경사의 돌들은 모두 울퉁불퉁하다기보다는... 조각처럼, 정말 조각품처럼 각이 져있다. 깨진 보석 같다. 마치 거친 자갈길을 확대해 보는 느낌이다. 아주 좋은 느낌을 주는 것은 그 돌들 위로 물길이 흐른다는 것이다. 산 위에서부터 타고 흐르는 것 같은데, 졸졸 또는 줄줄... 돌들을 적시며 햇빛을 반사시키는데 그 풍경이 일품이다. 작은 폭포들을 보고 있다.
노르웨이의 구름 낀 하늘은 입체적이다. 건물들을 보며 받았던 강한 인상은 창문이 한몫한다. 이곳 상당수의 건물 창문은 거의 완전히 하늘을 반사한다. 아주 파란 입체적인 하늘을 그대로 건물에 담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니 마치 하늘 속에 건물의 틀만 존재하는 것 같다. /2016
생각과 행동은 죽음에 반대한다.
생각과 행동이 곧 생동이다.
살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행동해야만 한다.
어제의 생각이 오늘의 행동이 되어야 하고 오늘의 행동이 내일의 생각이 되어야만 한다. /2016
백여 개가 넘는 서울의 현대건축물들을 봐도 제대로 감정이 있고 감동을 주는 건물은 두 손으로 꼽아도 손가락이 남아 오히려 민망하다. 이름있는 외국인 건축가들의 작품을 제외한다면 한 손으로도 충분히 셀 수 있을 정도다. 원래 도시는 잠재적이고 점진적인 쓰레기 더미지만 서울은 거기에 아주 근접하다. 애초에 건물을 뚫고 일그러뜨리고 덧붙일 때는 합리성이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건물들은 의미나 개념이 모호하다 못해 정말 그곳에 존재하나 싶다. 콘크리트 파편들과 유리조각들이 그저 널브러진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이런 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얽혀 살아간다. 상징성은 차고 넘칠 정도이지만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가 없다. 건축은 철학, 인문학과 통합되어 표현되어야 하지만 경계선은 확실히 해야 한다. 수 십 채의 서울의 현대건축을 보는 것보다 어느 촌의 조그마한 고택 하나 보는 것이 더 배울 것이 많다.
도시에서 좋은 건축물을 보려 발걸음을 너무 많이 옮기게 해서는 안된다. 좋은 건축물들이 모여 도시를 만들어야 하고 도시는 하나의 좋은 건축물이 되어야 한다. /2016
거창 정 씨 고가에서 윤경남 선생 고택으로 가는 길. 자동차 도로로 걷다 보니 옆에 강변을 따라 자전거 도로가 나있다. 차도, 사람도, 자전거도 없는 조용한 길에 자전거 도로로 걸어보기로 했다. 한여름의 여섯시. 햇살이 아직도 따가운 시간이지만 조금 걷다 보니 기가 막힌 풍경이 떠오른다. 끝없이 긴 도로와 양옆의 우거진 풀들. 옆에 흐르는 강물과 다리. 그 위에 저 멀리 얹힌 읍내의 건물들. 그 뒤로 몇 겹의 산들과 산에 올라서있는 태양. 흘러대는 땀조차 잊을 만한, 아주 기분 좋고 걷기 좋은 길이다. /2016
거창에 내려 시내버스를 타고 정씨 고가로 가는 길. 젊게 꾸민 한 할머니가 버스에 타 맨 앞자리에 앉곤 장본 큰 비닐에 든 생나물 한 움큼을 옆에 내려놓는다. 몇 정거장 후에 나이가 좀 더 많아 보이는 한 할머니가 타시다가 계단 바로 옆에 있던 그 나물을 차버린다. '좀 잘 보고 당기소' 크게 고함부터 지르는 할머니. 미안하다며 자리에 앉지만 젊은 할머니가 다시 한번 소리를 친다. 그 빽 지르는 고함소리에 나이 많은 할머니도 '미안하다 했잖여' 하시며 큰 소리로 응수하신다. 끝내 젊은 할머니의 입에서 쌍욕이 나온다. 둘이 싸우다, 또 버스기사분을 끼고 누가 잘못했냐 편가르기도 하다 그렇게 15분이 넘었다. 버스 안에는 할머니 두 분과 한 여중생과 나. 중간중간 우리 눈치를 보다 또 아랑곳 않고 싸우시길래 내리기 전쯤 어린 학생도 있는데 부끄럽지도 않으시냐고 말씀을 드리니 좀 잠잠하다. 기사님께 물어 내릴 곳에 내렸지만 아마 싸움은 둘 중 하나가 내릴 때야 끝날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내려 마을 안으로 들어가 찾던 집에 도착했다. 앞에는 역시나 철로 만든 문화재 푯말과 설명이 적혀있고 문은 닫힌 듯 열려있다. 스윽 밀고 들어가 보니 폐쇄적인 느낌이 물씬 나게 대문 바로 앞에 2층의 사랑채가 나를 내려다본다. ㄱ자의 사랑채의 툭 튀어나온 부분이 나를 가로막고 있다. 1층은 비어있는 공간으로 위를 받치는 기둥만 있다. 마당을 좀 둘러보다 안채를 보러 뒷문으로 가는데 사람이 산다는 느낌이 그제서야 들었다. 동시에 우연찮게도 나와 사랑채를 끼고 반대쪽으로, 정문으로 누군가 걸어가는 인기척을 느꼈다. 아차 싶은 마음에 급히 뒤로 가보니 한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께서 나를 보신다. 사과를 드리고 문화재를 보러 왔다고 말씀드리니 편하게 보란다. 안에 들어가서도 보고 가라는 할머니께 괜히 불편하실까 봐 괜찮다고 말씀드린다. 안채만 사용하시고 밖의 사랑채는 창고로 쓰시는 것 같았는데 아마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듯했다. 사진을 찍고 나와보니 아직 대문 쪽에서 뭔가 하고 계신다. 실례했다고, 잘 보고 간다고 말씀드리니 더 보고 가도 된다시며 대뜸 연거푸 고맙다는 말씀을 하신다. 외려 고맙다고 말해야 할 사람은 나라며 건강하시라며 나온다. 1년여간 가방 하나 메고 한국을 참 많이도 다녔는데 답사를 하며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것은 처음이다. 아마 문화재를 보러 누군가 찾아온 적이 거의 없거나 아주 오래되었거나 아예 없는 것 같았다. 혹은 집에 사람이 너무 오랜만에 와 반가웠을 수도 있겠다. 혹은 읍내에서 배차시간도 한 시간인 마을버스를 타고 들어와 이 마을에 문화재를 보러 온 노력이 가상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걸어서 2~30분쯤 걸리는 옆 마을의 윤경남 선생 고택을 보러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이 강변을 따라 쭉 이어졌는데 무성한 풀과 여름 햇빛에 반짝이는 강물이 너무 아름다워 더운 줄 모르고 걸었다. 아쉽게도 윤경남 선생 고택은 아무도 없는 듯 잠겨있었고 스카이라이프의 원반으로 보아 사람이 살고는 있는 듯했다. 담장 너머로 훑어보며 아쉬움을 달래다 마을을 나오는 길에 자그마한 냇가 위로 흐르는 다리에서 전동 의자에 타고 계신 할머니를 만났다. 내가 건너갈 때까지 빤히 보시다 '니 누꼬' 물으신다. 고택을 보러 온 학생이라 말씀드리니 니가 어디 어디 몇째 아들래민가 하신다. 두어 번 다시 설명드리니 그제서야 알겠다는듯하시며 또 대뜸 고맙다 해주신다. 놀랐다.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말을 하루에 두 번을 들으니 느낌이 체한 듯 이상해진다. 내가 왜 고맙다는 말을 들어야 하나? 그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없으면 더 이상 사람 사는 문화재도 없을 터인데. 내가 고맙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객이 없는가? 잠시 멈춰 서 돌이켜보니 여태껏 외진 옛집을 돌아다니며 관광객이든 학생이든 만난 적이 없다. 1년을 돌아다녔는데, 아무리 어긋났대도 한 번을 마주치지 못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들은 한국서 대체 무슨 건축을 하고 싶은 걸까? 특정 대학원생들이 교수 따라 답사를 다니는 것은 알고 있다. 그 외 많은 학생들은 어디서 무얼 하는가? /2016